나는 케이팝 고인물이다. 케이팝을 좋아한 지 너무 오래되었고, 보통 사람들보다 이 산업에 대한 관심도 애정도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소위 '덕질' 대상은 그동안 남자아이돌그룹에 한정되어왔다. 아무리 음악 산업이라 해도 무대와 공연을 기반으로 하는 쇼비즈니스이다보니 성적 매력이 그룹 선호의 유인으로 큰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인지, 보통은 성적 지향에 따라 최애 그룹이 결정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성적 매력 이외의 이유로도 아이돌 그룹을 좋아할 이유는 많다. 나는 안타깝게도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달아버렸다. 그래도 늦은 만큼, 남자 아이돌 그룹에 비해 홀대 받고 더 적게 주어지는 기회 속에서 고군분투하며 근사한 무대를 선보이는 여자 아이돌그룹에 대해 더 관심과 애정을 가지려고 노력 중이다. 사실 이들의 매력을 눈에 들이기 시작했다면 '노력'을 하지 않아도 어느덧 푹 빠질 수 있는 멋진 그룹들은 너무나 많다. 공부를 하고 같이 스터디를 하고 업무를 하며 만나는 사람들 중 유능한 여성들이 많은 것처럼, 여성들은 그들이 프로의식을 가지고 오르는 무대 위에서도 너무나 반짝반짝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무대 위의 사람이 주는 에너지가 정말 좋다. 그렇기 때문에 무대 위에 있는 사람이 퍼포먼스를 하며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을지, 어떤 마음으로 연습하고 마침내 관중에게 공연을 펼치게 될 지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조금 오만한 생각인지도 모르겠지만 내 생각에 여자아이돌 그룹에게 그들이 수행하라고 주어지는 노래와 안무는 본인들에게 아쉬울 여지를 많이 남기는 경우가 남자아이돌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많은 것 같다. 아무래도 대중(그놈의 대중!)들이 그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빤히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자 아이돌 그룹이 어떤 것이 주어지든 프로의식을 가지고 무대를 수행하는 것과 다르게, 그들이 만족시켜야만 하는 대상으로 상정되는 대중은 그것을 아주 무례한 방식으로 소비하기도 한다. 그래서 많이 슬펐다. 여성 아이돌들이 가진 재능과 열정은 저들만을 만족시키라고 있는 것은 아닐텐데. 더 다양하고 멋진 무대를 꾸미기 위한 기회를 기다리고 있을텐데 싶어서 아쉬웠다.
그런데 역시 여자 아이돌들 또한 현대인의 존버 정신을, 그것도 내가 가진 존버의 정신보다 훨씬 더 끈질기고 멋진 존버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 퀸덤이라는 약간 대충 생기다 만 기회인 것 같은 프로그램이 주어지자 이들은 이 기회를 본래 의도보다 더 좋은 방식으로, 백배, 천배 활용했다. 내가 어떤 도전을 하고 실패를 한다 한들 나 말고는 누가 알겠나 싶어도 도전이라는 것은 영 두려운 것인데, 이들은 따뜻하기보다는 적대적인 눈들이 기다리고 있는 경연 프로그램에 경력과 걸어온 길에 상관 없이 출연하여 못 다한 무대들을 펼쳐냈다. 나는 내 할일에 치이고 있는 요새의 하루 속에서 퀸덤 무대들만큼은 몇 번 더 보고 자고야 말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개별 그룹의 매력과 파이널 무대들에 대한 감상을 쓰자면 정말 한도 끝도 없이 길어질 것 같다. AOA, 러블리즈, 박봄, 오마이걸, 아이들, 마마무 만세 만만세.
근데 이건 쓰고 마무리해야겠다.
이제 환호의 음을 높여
모두 고개를 올려
어린 사자의 왕관을 씌우니
정말 미쳤나? 민니가 당당하게 걸어나와 무언가를 선언하듯 내지르는 고음으로 부르는 이 가사에, 스스로 머리에 왕관을 씌우는 안무를 보면 정말 기절할 것 같다. 이 무대를 준비하면서 무대 위의 당사자들이 느낄 수 있었을 것 같은 고양감 같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앞으로도 그들에게 이런 기회가 많았으면, 그래서 집 안에 들어앉은 나도 가슴 벅차는 멋진 무대를 많이 볼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그리고 그럴 것 같다. 여자아이돌들은 요만큼의 기회만 주어져도 그것으로 마법같은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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