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멘 샌디에고>는 내가 요새 푹 빠져 있는 애니메이션이다. 나는 드라마나 영화를 자주, 많이 보는 편은 전혀 아니다. 어떤 서사에 집중하는 것은 매우 즐겁지만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해서 드라마보다는 가볍게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을 더 편하게 시청하는 것 같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았는데, 애니메니션 인물은 실제 사람이 아니며, 조금 더 환상 속이나 다른 세상처럼 느껴져서 약간의 심적 거리감을 두고 볼 수 있다는 점이 좋다.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현실의 문제를 마주하며 감정을 쏟을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해야 하나. 나는 콘텐츠를 현실에서 멀어져 휴식을 취하고 싶을 때 즐겨서 이런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카르멘 샌디에고는 현대판 정의로운 여성 도둑의 이야기이다. 내가 이걸 어렸을 때 보았더라면 빨간 모자를 쓰고 카르멘을 따라한답시고 온 사방을 뛰어다녔을 것 같다. 어렸을 때 모험 만화를 좋아했어서 원피스도 정말 재밌게 보고는 했는데. 당시만 해도 이런 모험이나 액션물의 여자 주인공은 꽤 찾아보기 어려웠다. 여튼 이 애니메이션에서는 강렬한 레드 컬러의 코트를 입은 카르멘이 하늘 위는 물론 땅에서, 물 밑에서까지 종횡무진 누비며 전략과 전투로 빌런을 이겨먹는 재미를 맛볼 수 있다.
또한 카르멘 샌디에고는 각 화마다 세계 각국의 지역에서 에피소드를 그려내는데, 볼 때마다 의문이 드는 점이 있었다. 애니메이션은 카르멘이 범죄 조직인 바일(VILE)을 따돌리며 그들의 미션을 훼방 놓는 내용인데 배경이 되는 지역이 바뀔 때마다 그에 대한 상세한 배경설명 - 도시나 국가의 특성이나 문화에 대한 대한 설명을 꽤나 성의 있게 제공한다. 물론 보는 내가 재밌으므로 상관 없지만 정보 제공이 다소 뜬금 없게 느껴지긴 했었다. 알고 보니 애니메이션의 원작이 90년대에 있었던 <Where on Earth is Carmen Sandiego>라는 세계 문화/지리에 대한 교육용 학습게임이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고 나니 의문이 풀렸다. 구 버전의 애니메이션도 따로 있다고 하던데 그것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르겠다.
애니메이션은 이러한 특성을 다양한 방식으로 잘 살린다. 매번 설명이 나올 때마다 풍부하고 아름다운 화면을 제공하는 것은 당연하고, 설명 이외에도 사건이 벌어지는 지역의 특색을 잘 그려내려고 노력한 느낌이다. 그리고 모든 집단의 모든 구성원에 인종 다양성을 세심하게 고려했다. 그러한 인물들마다 영어의 액센트도 조금씩 다른 점도 매우 흥미롭게 느껴졌다. 인종 다양성은 물론, 젠더나 성적 지향도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주요 인물 중 프랑스 출신의 인물은 어두운 피부색의 인물로, 경제적으로 힘든 배경에 있었던 미국 인물은 백인으로 설정한 점도 좋다. 종종 인종 다양성이랍시고 모든 인종이 있는 가운데 동양인만 쏙 빼놓는 경우도 많은데 카르멘 샌디에고에서는 정말 다양한 인종이 주요 인물에 고려되어 있다. 물론 아쉬운 점이 없냐 하면 그것도 아니지만 일단은 괜찮은 수준이다.
특히나 인물들의 구성이나 대사 등에서 여성 empowering이 너무나 잘 느껴지기 때문에 더욱 재미있게 볼 수 있다. 카르멘 샌디에고 팀, 비밀 범죄 조직 VILE, 또 VILE의 정체를 밝히려 하는 ACME 모두에서 여성 인물들의 활약이 빛난다. 요새는 여성 주인공이거나 여성 인물들이 주요하게 나오지 않으면 잘 흥미가 가지 않는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여성 주인공 작품들에 대한 목마름이 이제 많이 채워지고 있는 것 같다.
여성 인물은 단순히 수적으로 많을 뿐만 아니라, 극중에서 이들이 펼치는 꽤나 박진감 넘치는 다양한 액션 씬들을 볼 수 있다. 또한, 작전을 반복하여 카르멘이 자신의 출생이나 가족과 관련된 스스로에 대한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위에 서술한 점들 말고도 사실 그냥 내용 자체로 흥미진진하게 즐길 수 있기 때문에 넷플릭스에서 뭐 또 가볍게 볼 것 없나 찾는 사람들에게 정말 추천한다. 한 화에 20분이라 금방 보고, 현재 시즌2 까지 나와 있다.
+) 요새 Where on google earth is Carmen Sandiego 라는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다고 한다. 아직 안 해 봤는데 시도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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